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프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사막의 방패 작전 === [[미국]]은 이라크가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를 병합한 것에 반발하며[* 친미 국가인 쿠웨이트의 소멸은 미국 입장에서 중동의 지지 세력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라크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친선관계를 맺고있었지만 어차피 이라크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킨 이상 이라크의 뒤를 더 이상 봐줄 이유가 없었다..] 이라크에게 당장 쿠웨이트에서 물러날것을 요구했다. [[국제연합]]에서도 이라크에 쿠웨이트에 대한 합병 철회와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이 결의안 채택과 함께 이라크에 경제 제재가 가해졌다. 그러나 이라크는 [[배급제]]를 시행하며 버텼고[* 전 국민에게 하루 두 끼씩만 먹도록 권장하고 [[비누]] 부족을 이유로 [[남자]]들은 이틀에 한 번씩만 [[세수]]하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전쟁에 익숙해서 평소 8~10개월분 식량을 가정마다 비축해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당은 무기한 영업정지 조치를 내려 식량 반출을 막았고 [[사재기]]를 엄하게 단속해 사재기하다 적발된 놈들은 최소 징역 15년 형 이상의 중형에 처하는 엄벌을 내렸다. 거기다 접경 국가들로부터 [[밀수]]가 이뤄져 경제 제재의 효과가 없었다. 이렇듯 후세인의 야욕이 명백해지자 미국은 '''사막의 방패 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을 통해 1차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보호해 교두보로 삼기로 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만인 8월 9일 이미 2개 여단의 공수부대가 빠르게 전개되었으며, 추가적으로 아파치 헬기등의 항공전력을 배치하여 방어를 굳건히 했다. 당시 세간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많았고 사담 후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걸프전이 베트남전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으며, 과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베트남전은 사실상 미국이 치렀던 전면전으로는 마지막으로 치른 전쟁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여러 군사작전은 전개됐었지만 [[파나마]] 사태는 [[국지전]]으로 치러진 소규모 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았다. [* 걸프전은 공화당 대통령이 주도한 20세기의 유일한 전면전이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이라크군]]은 중동의 군사강국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끌면서[* 국력이 4배에 달하는 이란을 상대로 대등 이상으로 싸웠으며 훨씬 우수한 교환비를 기록하고 전쟁의 결과로 호메이니는 실각해버렸다.]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지금의 [[북한군]]보다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특히나 수도 [[바그다드]]의 방공 능력은 저고도 구형 위주라고는 해도 웬만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뺨치는 수준으로, 바그다드보다 방공망이 강력한 곳은 '''[[모스크바]]''', '''[[바르샤바]]''', ~~'''[[평양]]'''~~ [* 좋게 봐서 강력한거지 현실은 1980년대에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미 공군 전투기가 실수로 개성 옆까지 날아와도, 납치 부호 달고 평양상공을 3바퀴 도는 중공 민항기가 있는데도 요격은 커녕 눈치채지도 못했으며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7/2017092703181.html|링크]] 2017년에 미 공군이 B-1과 F-15를 북한 영공까지 날려보내도 대응은 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바람에 미군이 직접 비행궤적을 공개하기까지 했다![[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709265167i|링크]]], [[캄차카 반도]] 등 모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미군]]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에 [[미합중국 중부사령부|중부사령부]][* 중동 지역을 담당하는 미군의 통합군 사령부.]에서 걸프전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실시한 [[워게임]]에서 져버린 적이 있는 데다,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병력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H. 노먼 슈워츠코프]] [[미합중국 육군]] [[대장(계급)|대장]]은 개전 전까지 휘하 병력을 2배로 늘리고, [[서유럽]] 방위의 중핵이나 다름없던 육군 [[제7군단(미국)|제7군단]]의 배치를 요구했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 장군도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상당하리라고 판단하여 중부사령부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고, 거기에 본토에 대기하고 있던 제1보병사단을 추가로 더 얹어준다. 미군은 자국의 정예 병력은 물론 다수의 최신예 병기와 동맹 국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전 세계의 친미 국가들이 거의 대부분 참여했다. 이들은 '[[다국적군]]'으로 불리며 사령관은 슈워츠코프 중부사령관이 맡았다.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드문 규모의 '다국전'이기도 하다. [[http://ko.wikipedia.org/wiki/걸프_전쟁|이걸]] 보면 납득이 가는데, 우측의 교전국에서 다국적부대의 숨겨진 항목을 열어보면 된다. 그야말로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일방적인 다굴전(...)이다. 미국은 이 전쟁을 길게 끌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적도 있었고, 베트남전의 악몽도 있었으며, 10월부터 4월까지 기간에 맞춰 전쟁을 끝내야 더운 기후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맞춰 철저한 작전 계획인 [[헤일 메리]] 기동과 정예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섬멸 및 쿠웨이트의 해방이 목표로 세워졌으며, 속전속결을 의도하였다. 파월 의장이 유럽 전선에서 최정예 군단을 빼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것도, 거기다 본토의 사단을 더 얹어준 것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빨리 전쟁 목표를 달성하고 빠져나오라는 뜻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전사자들을 담기 위해 '''만 단위의 시체 주머니를 준비했고''', 전문가들 역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체적으로 추정한 전사자 수만 무려 3만 명'''에 달했으므로 주머니 재고가 부족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1만 개를 더 질러서 쌓아두었다. 전후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불필요한 작업이 되었다. 비슷한 일로, 미군은 전차포탄 소요량을 대규모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 무려 22만 발가량으로 어림잡고 보급망으로 미친 듯이 실어날라 쌓아놨는데 그중에서 실제로 쏜 건 고작 수천 발 수준이었다. 100만의 군대를 철저하게 준비한 [[몰락 작전]]보다도 더 철저할 정도로 미군 역사상 전쟁 규모 대비 전쟁 준비가 이 정도로 철저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수십만의 미군의 대규모 해외 파병[* 그나마도 베트남에선 미군이 단계적으로 병력을 증가해서 54만 명까지 3년이 넘게 걸렸고 시간적 여유(?)로 인해 병참 부담을 약간 덜었지만 걸프전의 미군은 6개월 만에 70만 명이 배치되었다. 규모를 소폭 줄인 몰락 작전에 육박한다.]을 하게 되어 병참 소요가 천문학적으로 엄청났는데 미 육군 제22지원사령부 사령관 겸 중부사령부 군수참모부장이던 윌리엄 파고니스 육군 [[소장(계급)|소장]]이 초기에 현지 배치되어 총지휘를 했고, 파고니스 장군의 노력으로 미군은 병참상의 혼란 없이 전쟁을 잘 치렀다. 파고니스 장군은 공로를 인정받아 사우디 현지에서 [[중장]]으로 조기 진급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쓰였던 [[생화학무기]]가 위협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M1 에이브람스]] 전차의 엔진의 열로 화학 무기를 [[제독(동음이의어)|제독]]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 것은 후세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미국을 [[소모전]]으로 몰아넣어 일정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게 되면 미국 내 [[반전주의]] 여론 때문에 미국이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980년대]]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각국이 준비했던 전쟁의 양상인 소모전식 전쟁을 생각하면 심각할 정도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들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1990년 12월 부터는 이라크, 쿠웨이트에 억류되어 있던 서방인들의 출국을 허용하면서 미국의 반전 여론을 부추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후세인이 간과했던 것은 바로 부시 정부는 사막의 방패 작전을 펼치는 동시에 자국의 반전 여론을 돌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여론은 이라크의 침공에 분노했지만 반전여론이 좀 더 강력했다. 199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부시 행정부가 패배하면서 기세가 오른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의 참전 움직임에 청문회에서 과연 군사적 행동이 옳은 가에 대해 추궁하였다. 이때 청문회에 참석하여 미군 투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힌 사람 중에는 케네디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자 베트남 전쟁 참가 결정의 주역 로버트 맥나마라도 있었다. 이러한 반전 여론을 뒤집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나이라흐 알 사바흐라는 15살 소녀였다. 중간 선거 조금 이전인 10월 10일 나이라흐 알 사바흐는 의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이라크의 악행을 고발하였다. > 친애하는 의장님과 의원 여러분, 저는 나이라흐라고 하며 방금 막 쿠웨이트로 부터 빠져나왔습니다.어머니와 저는 8월 2일 평화로운 여름을 쿠웨이트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희 언니는 7월 29일 임신을 하였고 저희 가족은 그녀와 쿠웨이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 10학년 친구들이 저와 같은 여름방학을 보내지 않았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가끔 제가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길 원했습니다. 제가 제 조국 쿠웨이트와 쿠웨이트의 아이들에게 생긴일을 보면서 저의 인생, 모든 쿠웨이트의 어른, 어린이, 노인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 제 언니는 5살 조카와 안전을 위해 사막을 건너갔습니다. 쿠웨이트에는 아기를 위한 우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차가 고장났을 때 간신히 사우디 아라비아의 도움을 받아 사막을 빠져나왔습니다. > 저는 뒤에 남아서 제 조국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길 원헀습니다. 전쟁 발발 2주후 저는 12명의 저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Alldar 병원에 지원했습니다. 제가 제일 어린 지원자였습니다. 대부분 20~30세의 어른들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는 동안 저는 이라크 병사들이 병원으로 무장을 한채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기들 인큐베이터에서 꺼내더니 죽도록 차가운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너무나 끔직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태어난 제 조카가 저렇게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병원을 떠난 뒤 친구들과 이라크군을 규탄하는 전단지를 배포하였는데 이라크 군이 본다면 죽일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그만두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쿠웨이트의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슈퍼마켓의 음식, 약국의 약, 공장의 의료 보급품과 쿠웨이트 인들의 집을 약탈했고 제 친구들과 이웃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이라크 군으로 부터 납치되어 고문받은 뒤 풀려난 제 친구를 보고 대화를 나누었었습니다. 그는 22살이었지만 훨씬 나이가 들어버린 얼굴이었습니다. 이라크 군들은 그를 익사하기 직전까지 물에 얼굴을 박았었습니다. 이라크 군들은 그의 손톱을 뽑아버리고 그의 신체부위를 전기 고문했습니다. 그가 죽지않은 것이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이라크 군이 이웃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된다면 마을 전부를 불태우고 전소될 때 까지 소방관들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라크 군들은 부시 대통령을 조롱하며 언어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쿠웨이트를 탈출하는 저와 저희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우리는 쿠웨이트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탈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숨게하고 우리 국가와 정부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했습니다. >저는 쿠웨이트가 저희의 어머니이며 아버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이 말을 쿠웨이트의 저희 집 지붕에서 이라크 군이 저희를 쏠 때까지 계속 외칠 것이며 반드시 그렇게 반복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15살인 것이 자랑스럽고 쿠웨이트가 사담 후세인에게 파괴당하기 이전을 기억하고 다시 재건할 수 있을 만큼 어린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 > 1990년 10월 10일 나이라흐 증언 전문 해당 증언은 티비로 중계되었고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ABC nightline과 NBC Nightly News에서 중계한 해당 방송은 무려 3천5백만에서 5천 3백만 사이의 미국인들이 시청하였고 이 증언을 공화당 주전파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바로 그 다음주 부시 대통령은 해당 증언을 총 10번이나 인용하며 군사 개입의 정당성을 설파하였고 이라크 군의 만행에 분노한 미국여론은 대 이라크 전쟁 개전을 찬성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결국 미국 상원은 52:47로 걸프전 참전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1992년 걸프전 종료이후 밝혀지길 해당 증언을 했던 나이라흐는 쿠웨이트 왕족이자 미국 주재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음이었으며 이라크 침공 기간 동안 쿠웨이트에 있지 않았음이 밝혀지며 해당 증언이 미국 의회와 국민을 대상으로한 '''거짓 증언'''임이 밝혀져 크게 논란이 된다. 재미있게도 이라크군과 거의 완전히 동일한 군사장비를 운용하며 주요 교리 또한 이라크군과 비슷한 [[시리아군]]이 사단급 병력을 파견해 걸프전에 다국적군 편으로 참전해 이라크군을 견제하는 작전에 동참한 바 있다. 거기다가 양국의 정치 수반도 둘 다 [[바트당]]이란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예전부터 시리아-이라크 통일 문제에 대해서 시리아의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라크가 강한 국력으로 시리아를 병합할 가능성을 우려해 거절한 적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 때 부터 시리아는 이란에 간접적인 지원을 했고 사담과 하페즈 간의 노선 갈등도 있었으니 이 때다 하고 이라크를 친 것이다.[*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의 하위 분파인 알라위파로 이때문에 시아파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과 협력관계이다. 지금도 이란 대외전략의 기본은 이란-이라크 중부-시리아를 연결하는 시아파 초승달 벨트를 구축해서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를 압박하는 것이다.] 또한 시리아는 미국과의 정상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원했고 미국에게 점수 따기 위해 다국적군 편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이에 화답해 전후 [[빌 클린턴]]과 [[하페즈 알아사드]]의 회담으로 양국간 수교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 이후에도 시리아는 [[알 카에다]] 관련 정보들을 미국에게 제공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양국의 입장차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북한의 핵개발 협조 문제로 미국이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에 지정하며 양국간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여러가지 요인으로 미국이 시리아와 단교해 완전히 무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